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참전국 == [include(틀: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 [[파일:1차대전 포스터.jpg|height=500]] 제1차 세계대전 주요 참전국 정상들. 글 위에 있는 4명이 동맹국의 군주들[* 왼쪽부터 [[메흐메트 5세]], [[빌헬름 2세]], [[프란츠 요제프 1세]],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 밑에 있는 사람들이 협상국의 군주들이다.[* 단, 협상국 군주들 중에서 첫번째 줄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군주가 아닌 당시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다.] ||<-2> '''색 분류''' || || '''동맹국''' || '''협상국''' || || '''국명''' || '''날짜''' || '''참전 과정'''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이 거부되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 ||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 ||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여 침공을 당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 || || '''[[러시아 제국]]''' || 1914년 8월 2일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후견국이기도 했던 러시아에게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의 영향으로 더욱 중요성이 커졌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하였으며 이를 해제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의 선전포고를 받게 된다. || || '''[[독일 제국]] ''' || 1914년 8월 2일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서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삼국 동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에 의거하여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 || '''[[프랑스 제3공화국]]''' || 1914년 8월 3일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며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물론, 프랑스도 [[삼국협상]][* 프랑스, 러시아, 영국]에 의해 대독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벨기에]]''' || 1914년 8월 3일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킨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려는 것을 벨기에군이 거부, 끝내 영토통과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되자 독일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한다. || || '''[[영국]]''' || 1914년 8월 4일 ||[[삼국협상]]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려던 영국이었지만,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을 하자 이를 이유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 || '''[[몬테네그로 왕국]]''' || 1914년 8월 5일 ||발칸반도 남부의 소왕국이었던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언어, 문화, 종교적 동질성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반감 등으로 인해 세르비아를 지지한다. || || '''[[일본 제국]]''' || 1914년 8월 23일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영일동맹은 양국간의 공수동맹이지만 상대국의 자동 참전 의무같은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한 후에 14년 8월 1일 주일 영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에게는 이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독일의 동양함대가 홍콩과 웨이하이를 위협할 수 있었고 8월 4일에 영국 외무부는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참전으로 독일은 일본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다. 발발 당시 칭다오의 순양함급 이상은 2척에 불과했다. 8월15일 최후통첩 이후 1주일 만에 병력을 증강시키기에는 칭다오는 너무 멀었으며 이후 전개는 [[칭다오 전투]] 참조. 일본의 칭다오 점령과 강압적인 21개조 요구는 [[5.4 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 || '''[[오스만 제국]]''' || 1914년 11월 1일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HMS 애진코트|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 여론이 강해진다.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 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 ||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작은 국가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 흡수됨.] || 1915년 5월 사이 ||영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 '''[[이탈리아 왕국]]''' || 1915년 5월 23일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 다만 이탈리아는 의무를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상호방위조약으로 해석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거나 다름없는 이런 전쟁에는 끼어들 수 없다."라고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편에서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야, 이탈리아? 너네 왜 참전 안 해?"라고 나오기는커녕 "제발 그대로 중립 좀 지켜줘. OK?"라는 태도를 보였다.]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협상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 사실 [[삼국동맹]]을 믿기엔 불안한 감이 있어서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몇 년 전 프랑스와 비밀 동맹을 맺어둔 상태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튀니지를 두고 사이가 안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 하나 늘리냐 마느냐의 문제여서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일부를 점유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가로막는 역사적인 숙적이고 프랑스는 사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우방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일대는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고 이탈리아는 통일 완수라는 이유로 이 일대의 회복을 외치는 상황이었다. 삼국 동맹 소속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겐 독일이란 빽이 있어서 대놓고 드러내질 못했을 뿐.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국 측에 참전하면 전쟁 후 이 일대의 점유를 인정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즉, 2대전의 [[추축동맹]]이나 방공협정 마냥 견고한 동맹은 아니었던 셈.],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 '''[[불가리아 왕국]]''' || 1915년 10월 14일 ||전통적으로 친 러시아, 반 오스만 국가였으나 국왕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 출신인지라 친독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불가리아 여론도 [[발칸 전쟁#s-2|제2차 발칸 전쟁]]의 패배로 인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빼앗아 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복수하자는 보복주의가 팽배했다.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의 활약과 불가리아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불가리아를 포섭하려 시도했으나 불가리아는 참전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갖고 있는 [[마케도니아]] 중 일부 지역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눈치를 봐야 했던 협상국과 달리 두 나라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동맹국은 온갖 당근[* 북마케도니아 전체와 세르비아의 동쪽 절반, 그리스나 루마니아가 참전할 경우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두 나라에게 넘어갔던 지역의 합병 인정, 막대한 차관 제공 등.]으로 적극적으로 불가리아를 꼬드겼고 이에 넘어간 불가리아가 동맹국과 우호조약을 맺은 후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동맹국에 가담했다.|| || '''네지드 하사 토후국'''[*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에 해당하며 리야드 토후국이라고도 불림.] || 1915년 12월 16일 ||영국과의 다린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전쟁개시 || || '''[[포르투갈 제1공화국]]''' || 1916년 3월 9일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이후 수백여 년간 영국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포르투갈은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16년 2월 말엽부터 자국령에 들어오거나 항행 중인 독일 선박들을 나포하고 화물을 압류했다. 당연히 이에 격분한 독일이 포르투갈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 || '''[[헤자즈 왕국]]''' || 1916년 6월 ||당시 메카 태수였던 후세인 빈 알리는 협상국 측에 '오스만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준다면 아랍인들의 단일국가와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라는 약속을 받았고, 후세인 빈 알리는 이에 승락, 자신의 아들 파이살, 후세인과 함께 네지드 토후국 및 시리아와 이라크 방면 아랍 반란군과 함께 [[아랍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 || '''[[루마니아 왕국]]''' || 1916년 8월 27일 ||3년여 동안 중립을 지켜온 루마니아는 남쪽 불가리아의 위협, 동부전선에서 계속 죽을 쑤는 오스트리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동맹국에 불리해지는 전황 등을 토대로 전리품 획득을 위해서 늦게나마 참전을 결정하고 [[브루실로프 공세]]를 틈타서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겨우 1년 만에 독일군에게 본토를 다 털리고 항복한다. 다만 전쟁 종료 후에는 승전국으로 영토가 2배로 늘어나는 대박을 쳤다. 단, 이게 그냥 조약으로만 얻은 것은 아니고, 종전 직후 벌어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점령한 영토를 조약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 '''[[미국]]''' || 1917년 4월 6일 ||의외로 친독, 반영 세력도 많았으며[* 대체로 독일계 이민자 800만은 독일과의 싸움을 싫어했고, 아일랜드계 이민자 450만은 영국을 싫어했다.] 무엇보다 [[먼로 독트린]] 때문에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 유럽 국가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와는 상관없고 그냥 돈이나 벌자는 태도였다. 그러나, 독일의 U-Boat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어 미국인들이 휘말려서 죽게 되자 대독감정이 악화되었으며, 테러가 벌어지고,[* 1916년 7월에 뉴저지의 영국 수출용 탄약 창고가 폭발하고 (Black Tom explosion), 1917년 1월에는 영/프에 군용자동차를 수출하는 공장이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이 모두 독일에서 보낸 공작원의 소행으로 판명나면서 여론이 악화된 것도 있었다.] 심지어 독일이 멕시코를 꼬드겨서 미국에 대한 공격을 사주했다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미국 국내의 여론이 대폭발하게 되면서 마침내 협상국으로서 참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런 여론악화의 이면에는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이 세계 대전에서 영국 &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하면 [[먹튀|빌려준 돈을 못 돌려받을까봐]] 우려했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치머만 전보 사건이 미국의 참전 여론을 부채질한 것도 사실이다.|| || '''[[쿠바]]''' || 1917년 4월 7일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 '''[[그리스 왕국]]''' || 1917년 6월 30일 ||당시 친독 성향이었던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계속 유지하길 원했지만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선 궁극적으로는 협상국에 가담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렇게 그리스는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 때문에 세르비아의 지원 요청이나 협상국의 참전 요구를 모두 묵살했다. 이렇게 불안한 중립을 유지하던 와중에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실패하고 불가리아가 갑자기 동맹국에 가담해 세르비아를 공격하자 포위당할 위기에 빠진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를 통해 그리스로 후퇴하였고 불가리아군이 아직 전쟁 준비가 덜 된 그리스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베니젤로스는 영-불 연합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 세르비아를 지원할 것을 요청하였다. 베니젤로스의 독단에 격노한 국왕 콘스탄디노스는 베니젤로스를 해임,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이미 테살로니키에 상륙한 영-불 연합군은 전쟁 준비에 나섰으며 불가리아군은 이에 대응하여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를 침공한다. 이렇게 되니 정작 중립을 선언한 그리스 영토에서 연합군과 동맹군이 전투를 벌이는 촌극이 펼쳐지고 해임된 베니젤로스는 연합군이 점령한 테살로니키로 이동해 임시정부를 수립, 협상국 측에 가담하고 그리스 여론도 친베니젤로스파와 친국왕파로 분열되어 버린다. 결국 협상국의 지지를 받은 친베니젤로스파가 승리해 1917년 6월 콘스탄디노스는 퇴위,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으며[* 장남 [[요르요스 2세]]는 독일에 군사 훈련을 가 있었기 때문에 베니젤로스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양위가 불가능했다.] 정권을 잡은 베니젤로스는 정식으로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리스는 협상국 측으로 참전한다.|| || '''[[태국]]''' || 1917년 7월 22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서부 전선에 1284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 || '''[[중화민국 북양정부]]''' || 1917년 8월 14일 ||[[신해혁명#s-4|제3혁명]]과 [[위안스카이]] 사망으로 공화국이 된 중국은 독일로부터 빼앗긴 조차지의 이권과 중국 영토를 다시 되찾고, 새 국가 건설에서 세계열강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협상국으로 가담한다.[* 이때 비전투 노무자(노동자) 20만 명을 서부전선으로 보낸다.] 그러나 독일의 조차지는 사라졌었고 중국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하지만 근 100년 가까이 중국 사회를 좀 먹은 열강의 아편 판매를 종식시키는 성과를 얻었고, 5.4운동으로 칭다오 등 구 독일의 점령지 이권은 다시 돌려 받았다.]|| || '''[[브라질]]''' || 1917년 10월 26일 ||공식적으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따른 피해, 그에 따른 반독여론 증가였지만…. 브라질은 당시 세계 [[커피]]생산량의 90% 이상을 독점하는 커피 플랜테이션 국가였는데, 1차 대전 직후 동맹국에 대한 해상봉쇄로 커피판로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서 수출액이 감소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이 "커피 재고 우리가 다 사줄 테니까 독일에다 선전포고해."라고 제안했고 브라질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외에도 [[라이베리아]], [[파나마]], [[쿠바]],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아이티]], [[온두라스]], [[에콰도르]], [[볼리비아]], [[우루과이]], [[페루]]가 협상국에 속해 있었지만 그냥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니까 따라서 하거나 형식상으로만 선전포고를 한 경우로 기껏해야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한 수준이다. 협상국에 합류한 국가들이 더 있는데 대표적으로 [[안도라]], [[네팔 왕국]], [[산마리노]], [[모나코]] 등이 있는데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네팔의 경우 수십명의 병력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영국의 식민지 또는 보호령이었던 캐나다, 인도, 뉴펀들랜드 자치령,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로디지아, 몰타 등등도 전쟁에 합류했다. 또 국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지원한 곳은 아르메니아, 폴란드, 헤자즈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있다. 기타 동맹국에는 다르푸르 술탄국, 데르비시국[*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에 위치.], 자발 샴마르 토후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이 있으나 선전포고 시기가 모호하며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도 잠시 독일에게 점령되었지만 곧 독일이 패망했으므로 제외한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결과였다.]저장 버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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